Bud

한참 친구들의 스토리에는 굳게 닫혀 있던 목련이나 매화나 벚꽃, 산수유 만개하는 사진이 올라온다. 그러나 대부분 친구들의 사진에서 따뜻한 빛이 배경으로 느껴지진 않고, 아직은 차가운 바람에 점심 먹을 때쯤 뜬 해가 아주 따뜻해서 그 온기를 모아 눈총 받듯 피어난 꽃망울처럼 보인다. 

나는 방방곡곡에서 하는 꽃축제에 가 본 적 없지만 뉴스를 통해 만개한 꽃 틈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이 혹은 연인들이 꽃과 함께 사진을 찍고 그곳을 걷는 장면을 보았다. 

이나무, 저 나무 사랑스러운 빛의 꽃들이 만개해 휘날리는 사랑의 봄 보다 나는 꽃 ‘ 필 무렵’ 이 왜 더 좋은가 . 

한 가지에 맺힌 여러 개의 꽃망울이 굳게 닫혀 있다 피어오르기 위해 자신을 감싸던 꽃잎을 내밀고 고개를 민다. 

밀고 나와 활짝 핀 꽃이 품고 있는 완전한 아름다움에 취하기도 하지만, 핀 꽃 뒤로 남아있는 꽃 몽우리가 소리 없이 기를 쓰고 탄생하기 위한 아름다움은 더욱 감동이다. 

이처럼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을 넘어 ‘ 아름다움으로 향하는 움직임 ‘이다. 

이처럼 아름다움은 ‘갓 태어난 아이 ‘를 넘어 ‘ 고이 품었던 열 달이 지나 어머니가 아이를 잉태하는 순간’ 이다.

이처럼 아름다움은 ‘명사’ 가 아닌 ‘동사’이다. 

이곳은 늘 따뜻하고 덥다. 꽃망울을 느낄 새 없이 만개한 꽃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렇게 꽃망울을 더 애찬하는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빠르게 만개하는 이 곳에서 아름다움을 머금은 꽃망울을 아직 본 적 없으니 돌아오는 주말에는 식물원을 한 바퀴 돌아봐야겠다.

A Monarch butterfly in the sun

점심을 챙기고 어지럽힌 설거지를 미루지 않고 긴 테이블에 나와 앉았다. 해가 쨍쨍하지 않아 커튼을 열어놓지 않으려다 창문 앞에 줄줄이 늘어져 있는 식물들은 얼마 없는 햇빛이라도 기다리는 눈치다. 살며시 커튼을 열어 재켰다. 엇. 걷은 커튼 사이로 창문 틈에 붙어 얼마 없는 햇빛에 일광욕하는 제왕나비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제왕나비의 애벌레가 우리가든 여기저기 기어 다니던 터라 애정이 있었고, 번데기가 되는 흔적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어 뿔뿔이 흩어져보다 생각했기에 아쉬움만 있었다. 어디서나 나비로 다시 태어나 잘 살고 있겠지.

기대 없는 방문에, 깜짝 놀란 나는 한동안 창문에 붙은 나비를 쳐다보았다. 날개를 접고 있어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 모르는 상태.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안쪽 창문에서 똑똑 두드려 진동을 주었지만 꼼짝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제왕나비가 우리 집 벽에 찰싹 붙어준 것이 고맙기까지 했는데, 저기서 바짝 말라죽은 것이라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나가서 일 미터 정도 다가갔더니 하고 접혀 있어 저렇게 클 줄 몰랐던 큰 날개가 펄럭이다 꽃에 한번 앉고 다시 벽에 붙는 것이 아닌가. 아. 따뜻한 햇볕을 받고 있구나. 움직임 없이 햇빛을 흡수하고 있었다. 나 일광욕해. 라고 말할 일 없는 나비를 보는 순간, 햇볕을 쬐고 있구나 느꼈다. 작은 나비가 얼마나 신기하던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움직임을 포착하고 싶었다. 어린아이처럼. 그러나 고요하게. 관찰자의 역활로.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그대로 앉아 날개를 몇 번 접었다 폈다 하며 해를 받고 있다. 얼마나 추웠던 밤이었는지. 오는 길 바다에 날개가 푹 빠져 날개를 말려야 하는지. 혹은 우리 정원에서 열심히 기어 다니던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고향에 방문한 건지. 알일 없지만 나는 신이 났다.

해가 떠오르면, 나비는 날개를 펴서 따뜻한 햇살 쪽으로 각도를 맞춘다. 활짝 편 날개는 소형 태양 전지판과 같은 역할을 하여 필요한 열을 곧 흡수하며, 그리하여 나비는 날아오른다. 하지만 하늘에 구름이 낄 때는 어떻게 하는가? 기후가 서늘한 지대에서는 해가 날 때까지 나비들은 그대로—편리한 가지나 꽃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게을러서가 아니다. 그야말로 절실한 필요 때문이다. <책 나비의 하루생활 중에 >

나는 지금 나비의 절실한 필요의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 흡수하는 현장. 날아오르기 전의 현장. 에너지를 모으고 있는 현장. 애타고 절실함의 행동과는 무색하게 넓은 날개를 펼치고 햇빛이 모아지기를 기다린다. 축척한다. 고요하게 묵상한다. 어쩌면 나비는 이런 식이 익숙할지 모른다.

‘다 자란’ 애벌레가 명주로 된 줄에 매달려 애벌레라는 껍질을 벗어던지고 다시 ‘번데기’ 를 선택함으로써 기다려야하는 일. 엄청나게 먹어대던 시간을 멈추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무런 활동이 없어 죽은 것처럼 보이는 ‘무’ 안에서 이미 시작하고 있던 새로운 움직임을.

밖에서는 상상 할 수 없는 일이 안에서 새롭게 ‘나비’로 변화하는 과정을 . 이미 모든 과정을 겪어 나비가 된 이 제왕나비는 만리향 나무 위에 아무 움직임 없이 햇빛을 받는 순간을 고요하게 사색하고 묵상한다. 따뜻한 빛이 그 안에 채워져 움직일 힘을 모아 어디든 또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의 소명처럼. 어딘가 믿는 구석 있어 보이는 나비의 묵직함이 내 안에 남아 있다.

요즘 나의 묵상이 제왕나비에 있다. 제왕나비를 보는 것은 거울같았다. 그러므로 소망하기론 내 하루도 빛을 흡수하는 제왕나비와 같은 결의 하루이기를 바라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에너지를 모으는 현장인지 아닌지 본인은 알 수 없지만 제3자가 보면 혹은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겠다. 나는 큰 슈트를 입고 묵직한 척하며 회색 서류 가방 안에 어리광이 잔뜩 담긴 결제 서류 뭉치들을 쉴틈없이 그의 앞에서 펄럭였다. 눈을 감고 생각해도 그런 모습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의 안. 도 내 껍데기도 알아채지 못했고, 그의 앞에 섰을 때 이런 고백이 나왔다. 나요. 이 서류들 정말 나에게 중요한 서류인데, 이것에 앞서 아주 당신 필요해요. 사마리아 여인처럼 당신의 귀한 비밀을 알아챌 수 있을까 모르지만, 나도 영원하게 목마르지 않는 물을 마시고 싶어요. 구해서 주신다면, 그 물을 마시고 싶어요. 서류 뭉텅이를 넘어 당신과의 관계, 꽉차고 싶어요.

마치 곧 한 달 혹 두 달 뒤 찐한 향으로 집 전체를 덮을 꽃을 필 것을 아는듯이, 이미 아름다운 만리향 나무 위에 누워 빛을 쬐는 제왕나비의 고백처럼.

나의 절실한 고백.

The Sower, beautiful one.

고요한 발버둥.

바다 앞에 살아도 바닷속에 들어가 본 적 없는 나는, 침침하고 한번 잡으면 놔 주지 않을 것 같은 어두운 물이 두렵다. 당연, 영석은 바닷속에서 혹은 바다 위에서 그렇게 아이처럼 신나게 노는 얼굴을 보면 내가 퍽 부러워 할 만도 하지만, 그런 아쉬움 없이 모래사장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누워 하늘을 쳐다보면 지루할 틈 없이 각자 시간을 잘 보낸다. 그러던 중 우린 하와이 오하우로 휴가를 갔다. 아름다운 곳. 하와이의 바다는 내가 본 바다와는 다르게 서 있으면 발이 보일 정도로 깨끗했다. 나를 삼킬 것처럼 다가오는 무서운 파도가 아닌 잔잔히 부드럽게. 바다에 왔는데 들어가네 마네 이런 고민없이 몸이 전진하고 있었다. 기뻤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있다는 사실이. 자연은 내가 부름받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아가게 만든다. 이런 기쁨은 태초의 인간 안에 있는 본능일까? 나란 사람이 이곳에 잘 맞을까 그렇지 않을까라는 염려 없이, 판단 없이 온전히 환영받고 환영하는 곳. 우린 스노쿨링 장비를 사서 바다 안을 누볐다. 수영을 할 줄 모르지만, 영석에게 알려달라고 하여, 심지어 첫째 날에는 영석 구명조끼에 있는 줄을 잡고 다녔다. 함성이 나올 정도로 신나면서 한편으론 얼마나 미안하던지. 그래서 다음 날은 발차기와 물에서 어떻게 해야 뜰 수 있는지 배웠다. 그리고 빠질 것 같다는 상상으로 당황하는 스스로에게 돈 패닉. 을 얼마나 되뇌었는지. 내 키를 보다 깊은 곳을 탐험하고 싶다는 마음은 없었다. 곧 덮쳐오는 물이 나를 삼킬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에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곳에서 놀았다. 눈을 맞춘 물고기들은 인간을 물고기처럼 인지하는지 화들짝 놀라는 내색 없이 자연스러운 물의 흐름을 따라 이리로 가고 저리로 갔다. 물속에서 나의 존재는 고요한 발버둥이었다. 물은 나를 눌러 촐싹맞은 움직임을 묵직하게 만들었다. 숨 쉬는 소리만 들리는 고요함. 이질적인 소음 없이 본인의 숨소리만을 귀로 들어 본 적이 있었던가. 내가 뱉은 숨만 들리는 고요한 곳. 물속은 묵직하지만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양수 안에 있었을 때 이런 고요함이었을까? 태 안에서의 발버둥도 이랬을까?

지금 나의 시즌은 허락된 고요한 발버둥.이라고 말하고 싶다. 얼마 전부터 내 생각만 가득해서 괴로울 정도로 힘이 들었다. 환기 없이 떠다니는 생각에 몰살되었다. 기운도 없고 의욕도 없는. 불안하고 불쌍한 상태. 머릿속 안에서 소리를 빽빽 지르며 이것저것 발로 차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 오하우 바닷속 안에서 느꼈던 고요한 발버둥이 생각이 났다. 그것은 앞이 보이지 않는 빈 땅에 무엇이 될지 모르는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요하게 씨를 뿌리는 사람과 동일선상이다. 영양가 없는 많은 생각과 과욕은 씨를 뿌리지 못한다. 기다림을 허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씨앗을 뿌린다는 것은 불확실함 속에 불안이 아닌 기다리는 행위로 넘길 줄 알고, 기다림과 흙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을 볼 때의 미소 지어지는 희열의 맛이다. 혹 기다렸지만 발아가 실패하더라도 다시 씨앗을 뿌리는 행위. 너무 시시해서 어디에서 쳐주지 않을 경험들이 엮어져 생기는 촘촘함과 단단함을 경외한다. 그렇게 넘기는 것이다. 오하우 푸른 바다 안에서 배운 고요한 발버둥의 경험으로 나는 지금 이 시즌을 감사하게. 넘어가고 있다.

SF

누워서 잠깐 잠이 들다 밖에 자기 이야기하며 바쁜 호스텔 사람들 덕에 천장에 붙을 거 같은 이 높은 이층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 참, 서른 살에 처음 누워 본 호스텔에서 가벼운 마음보다 생각이 자꾸 서로 물어. 불편한 선택들을. 음- 그러니까 호스텔, 세 번의 환승, 기초 체력이 좋아보이는 친구와 하는 여행에서 순간순간 힘들고 짜증 나게 볼 게 아니라 어떻게 마주하는 상황을 적절하게 나 자신과 섞고 누려야 할지 말이야. 돈을 떠나서 상황에 유연한 사람. 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불 꺼진 곳에서 한다. 있어도 교만하지 않고 감사하게, 없어도 궁색하지 않고 초라하지 않게. 써야 할 곳과 허리띠 매어 아껴야 할 것을 잘 아는 사람. 불편한 마음을 유연하게 둘러 하하하 웃을 때도, 혹은 그 마음 소화시키게 나 자신에게 시간을 줄 수 있는 사람.

그 곳에 누워 잠이 안와 영석에게 보낸 편지.

그렇게 아끼는 여행을 하기로 하고 기대했던 태평양 바닷가 뷰와는 달린 넓은 체리 농장의 나무들이 빽빽이 펼쳐있는 건조한 땅을 여섯 시간 보면서 달리는 버스와 기차를 타고 8시간 만에 도착한 여행지. 5일을 묶어야 했던 호스텔. 하루 머물고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어 바로 앞 호텔로 옮기고. 하루 종일 여기저기 걸어 다닌 여행. 너무 힘들어 표정도 굳어졌지만, 이성만은 놓지 말자. 내일은 침대에만 있어야지 되뇌고 자신을 달랜 후 걸었던 토요일 일정. 맛있는 식사를 한 끼로. 저녁을 과일로, 호빵으로 해결하고 남아있는 반쪽의 백미 빵은 아침으로 먹겠다고 서늘한 창문에 올려놓는다. 저녁 늦게 호텔 앞 한국 술집에 들어가 홍합탕과 함께 소주. 더 빨리 돌아가는 길을 찾다가 가다 보니 낭떠러지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 손 내밀고 잡아 준 친구의 손. 부엌에서 요리하면서 파스타 면이 익는 동안 나눈 꿈에 대한 대화. 손에 들고 온 선물이라곤 커피를 좋아하는 짝을 위한 커피콩과 들렸던 서점에서 산 책. 그리고 차이나타운에서 거리에 쪼그려 과일 팔던 아저씨에게 덤탱이 씌어 산 비파열매.

그렇게 아끼는 여행을 하니 몸과 마음이 힘들어 집으로 돌아와 한동안 말없이 잠을 잤다. 낮잠 깬 후 거실에 나가니 친구가 집으로 돌아가기 전 꽃을 사와 저 멀리 구석 덩그러니 있는 내가 만든 화병을 찾아 물게 핀 흰 안개를 꽂아 식탁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저녁값 아끼던 친구가 꽂아놓은 안개꽃이라 더 귀하다고 생각이 되었다. 수수하지만 화려하게. 수수하지만 화려할 수도 있지? 안개꽃은 나에게 소삭이는 것 같았다. 여행 둘째날 지나가던 길에서 필사적으로 파란색 우체통을 찾아 먼지쌓인 입구에 편지 넣어 그에게 붙인 이 편지가 타인과 처음여행의 굳은 시작의 다짐문이었다. 편지는 내가 다시 집에 도착하기 9시간 전에 그에게 도착했다.

시간이 지나면 정말 다 좋은 추억으로 남겨지니, 너그러히. 친절하게. 솔직하게.

읽은 김지수의 칼럼 중 머릿속에 남아있는 글. 몇 줄을 적어보았다. 강해지려면 다정 해야 져야한다. 다정해지려면 부드러워져야 한다. 부드러지기 위해선 우리는 필사적으로 서로 ‘감각’ 해야 한다. 조금씩 편견 없이 강인한 경계인들의 세상이 오고 있다. 고향과 타향, 어느 곳에 있든 오직 자기 자신이 삶의 컨트롤 키를 쥔 채로 당당했던 자의 얼굴. 자신도 타인도 함부로 판단해 보지 않은 편견 없는 자의 얼굴. 스스로를 기특해하고 타인을 애틋해하는, 결과적으로 역경과 유랑을 통해 독특하게 깊어진 나그네의 얼굴.

학교 다닐 때 이후로 읽어본 적 없는 소설을 읽게 되었다. 장편 소설은 아니고. 정이현 작가의 <언니> 라는 한 번에 몰입해서 읽기 적당한 양의 소설이었는데. 한 장, 한 장 넘기는 것이 아쉬워 며칠에 걸쳐 읽었다. 바스락거리는 얇은 종이처럼 읽을 때마다 그 속으로 들어가 먹먹하게 혹은 그 공간에 같이 있는 사람처럼 몰입했다. 꼬리를 무는 감정들이 머릿속에서 왱왱거리며 맴도는데, 구인회 언니라는 사람이. 말이다. 읽으면서 좋았던 구절을 적어놓았다. 다시 도서관에 반납하기 전에 샤프를 들어서.

확실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오래전의 기억이란 그리 흔한 것이 아니다.

이 날의 일이 흰 타일 위에 지워지지 않고 연하게 밴 카레 얼룩처럼 마음에 오래 남아 있다.

그 중 적당한 걸로 두셋 시켜 나눠 먹으면 되겠다고 한 건 성주였다. 언니는 의견이 달랐다. “아니야. 각자 가장 먹고 싶은 게 있을 텐데.” 나는 그 때 인회 언니에게서 진지함을 넘어서는 어떤 엄숙한 기운을 느꼈다. ” 너희도 집중해봐. 이 순간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언니가 가만히 내 이름을 부를 때면 언니가 진짜 우리 언니같이 느껴졌다. ” 나는 있잖아. 이 일이 참 재밌다. 그래서 어떻게든 꼭 잘해내고 싶어.” 낙관도 비관도 없이 의지에 의해 걷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머릿속에 떠올랐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입 밖에 내야만 하는 것은 아닌데 대학이라는 곳에 온 뒤부터 종종 혼란스러웠다. ” 그 언니는.” 뜻밖에 성주의 목소리였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걸 기어코 하는 사람이야. “

Things left behind

4. 15. 2022

떠나고 남겨지는 것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혹 물건이라면 그것의 존재는 무엇이었는지. 남고 벗은 껍데기가 그 속을 말해준다.

사월동안 홀로 뉴욕에 친구를 보러 방문을 하였고 떠나는 마지막 날에는, 그녀의 집에 메말라 죽어있던 바질나무를 비우고 그 흙을 정리한 후 씨앗을 남기고 왔다. 저녁을 먹은 후 아프리카에서 가지고 온 망고를 먹은 후 그 큰 씨앗을 쪼개 안에 있는 진짜 씨앗이 싹을 틀 수 있게 작은 온실을 만들고 돌아왔다.

월요일부터 목요일. 뉴욕에서 친구가 봄방학을 맞이해서 쉴 겸 우리집에 놀러왔다. 그녀는 브루클린, 학교에서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 자기 전에도 생각하면 미소가 지어지는 선생님. 지원

우리도 처음인 사월의 캘리포니아를, 가만히 있어도 빛나는 태양이 바다를 반사시켜 반짝이는 그 위로 배를 타고 나갔다. 항해가 익숙한 선장처럼 겁 없이 앉아 고래를 찾으면 제일 먼저 보겠다며 뱃 머리 위에 앉아 있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수평선과 물은 패턴을 가지고 울렁거렸다. 큰 파도가 다가오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심장이 아래로 내려갔다 다시 붙었다. 지원과 나는 바다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녀와 했던 지난 여행은 7년 전 이스라엘 사해와 텔아비브의 바다를 서로의 손을 의지삼아 발이 닫지 않는 바다에 몸을 담갔다. 성인이 된 후 들어간 첫 바다였다. 그렇게 우린 다시 바다 위에서 오랜만에 하는 두번째 여행을 한다. 지원은 옆에서 계속 surreal해. 하경아 바다가 너무 Surreal해… 정말이지 그녀의 말처럼 비현실적이었다. 가도가도 끝이 없었으며 자꾸 반복하는 파도소리와 파도결이 때문에 미궁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의식적으로 정신을 차렸다. 고래보는 수확은 없었지만, 배 아래로 지나가는 장난심 많은 돌고래 때문에 돌고래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웃고 있는 돌고래의 얼굴이 잔상에 남아 있는데 책이나 영상에서 보던 돌고래의 표정과 비슷해 실제로 봤을 때, 이것이 현실인지 알고 있는 기억의 잔상인지 순간 인지하기 어려웠다.

언제나 지원과의 여행은 여유있고, 허허허 웃으면 모든 것을 추억으로 만드는 마술을 가지고 있는 친구이기에. 고래보기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장장 두시간 반의 뱃주인 행세를 한 것이 우리가 이번 여행을 마쳤을 때 기뻐하는 아이처럼 신나는 이유였다.

그녀는 화가. 저녁을 먹은 후 선물이 있다고 우리를 불러 앉아 각자 손에 따뜻한 차를 가지고 앉았다. 선물은 투명한 안을 볼 수 있는 유리잔이었고, 다른 하나의 선물을 퍽 감동이 되어 소리지름과 동시에 눈물이 핑 돌았는데. 그녀가 그린 그림 선물이었다.

그림과 함께 글을 선물해주었다.

햇빛이 우리를 위로해요.백지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니라 깨끗하고 맑아진 삶, 마음 안에서부터 더 튼튼하고 씩씩한 풀이 자라고 있다고 그 어디에 살든지/ 그 어느땅에 살든지/ 그 어느사람들과 살든지/ 따뜻하고 큰 햇빛은 우리의 뿌리가 되어주어요. 우리가 더 튼튼하고 씩씩하게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위로해주세요. 용기를 주어요.

지원은 어젯밤 9시 비행기로 다시 그녀가 살고 있는 뉴욕으로 돌아갔다. 작은 못과 망치를 챙겨 우리의 방, 지원이 머물렀던 그 곳 침대 위에 그녀가 선물해준 그림을 걸었다. 떠나고 남겨지는 것들. 그녀가 우리집을 떠나고 남아 있는 것은 방에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 위로 그녀의 그림. 그 여유롭고 위로의 허물같은 것이. 방 가운데 걸려있다.

pomegranate. soybean paste stew

석류까는 밤. 투명하게 빛나는 붉은 이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어. 치과의사처럼 손을 몇번이고 씻었는지 몰라. 섬세하게 알알이 박힌 붉은 구슬을 조심스럽게 .

문득 가방 끈 반짝 잡아매는, 초인종을 누를 때 목소리를 다듬는, 문을 열 때.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연습해보이는 과거의 잔상이 아른 거렸다 . 그 때로 돌아가면 잘 즐길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다시 새로워 진 이곳에서 새로운 일을 일어나면 나는 똑같이 끈을 반짝 잡아매고, 머릿속에서 몇번이고 연습해보이는 내 모습 그대로 있을 거같다. 긴장과 어색이 나를 발전시키나는 것을 안다.

완벽하지 않지만 이뻐. 정이 가.

아름다움은 곧 기쁨이어야 합니다. 언젠가 그라세 씨가 파리에서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 아름다움은 곧 기쁨이어야 합니다. ‘마을을 벗어나 먼 곳에 별로 가본 적이 없는, 소박한 영혼을 가진 도예공의 손끝에서 탄생한 것이지. 이렇게 색채는 묘사가 아니라 뭔가를 상기시키는 데 쓰여야 해.

2021년에 쓴 멈춰있는 글을 클릭했다. 멈춰 있는 글. 몇 줄 이어 끄적인 메모를 끝을 맺지 못하고 남겨진 노트가 나에게 꽤 있다. 14개 /

느즈막한 오후와 초저녁, 가끔 뚝배기에 육수를 우려 된장찌개를 끓인다. 국보다는 찌개를 좋아하고 찌개의 모양은 국과 비슷하다. 글 속의 찌개를 상상하면 무슨 말인가 하지만 보면 이해가 간다. 찌개라고 하기엔 간이 슴슴하고 국이라고 하기엔 국물양이 적은 나의 찌개. 무튼 이야기로 돌아와서 창문 넘어 해가 넘어가려는 밝은 저녁에 야자수가 흔들리는 장면을 보며 마늘을 까고 있으면 어린 시절이 떠올라 요리하던 할머니가 아른거린다. 시간때도 5시쯔음. 조용한 할머니 방에서 나와 할머니는 부엌에서 달그락 거리셨다. 그럼 뒷 식탁에서 할머니가 나에게 일거리로 준 마늘을 까거나 콩나물 끝을 따거나 콩껍질을 골라낼 때 보았던 할머니의 뒷모습이 내 모습과 겹쳤다. 이곳이 먼 외국 땅인지, 아파트403호 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고향을 사무치게 그리워하지 않게 점점 변하는 것은 된장찌개와 내모습이 할머니로 겹치는 모습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랑과 감사를 남겨놓고 떠난 금주 할머니 덕에, 가끔 그녀와 비슷하게 꽃을 좋아하는 할머니를 보거나, 땅 바닥에 앉아 엉덩이와 손 끝에 흙이 묻은 줄 모르게 열심히 잡초를 뽑는 비슷한 할머니를 볼 때는 얼굴이 구겨지게 눈물이 나지만, 나의 행동에서 금주씨가 모락피어나는 이 기분이 퍽 좋다.

바닷가 마을. 흐린날이면 집에서 볼 때 푸른 바다는 가려 하얗고 뿌연 해무가 올라온다. 어젯 밤은 생강차를 끓이기 위해 숟가락으로 생강을 벅벅 긁었다. 생강을 칼로 사과처럼 돌려 깎으려면 껍질에 붙어 버려지는 것들이 더 많지만, 숟가락을 뒤로 돌려 밥 떠먹는 쪽으로 생강을 긁으면 야무지게 버리는 것 없이 사용할 수 있다고 할머니의 지혜를 알려주었다. 그렇게 생강을 넣어 펄펄 끓인다음, 레몬을 절구에 넣고 즙을 짜, 꿀을 넣고 약처럼 마신다. 이런 과정을 준비하면서 밤에 조용한 부엌에 서 준비하노라니 밖 파도소리가 세다. 내가 듣고 있는 것이 진짜 파도 소리인가 싶어 창문을 열고 귀를 가져다 대니 맞다. 파도소리. 거센 파도. 그 위로는 케냐에서처럼, 서울에선 본 적 없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밤하늘의 별이 수두룩하게 떠 있다.

뚤뚤뚤. 뚤뚤뚤. 쏴와. 쏴 와 . 뚤뚤 뚜뚤뚤..

New York, 2022

21년 크리스마스를 뉴욕에서 화려하게 보내기로 약속하고 영석이 아파 취소했었다. 뒤로 미룬 여행은 티켓유효권이 없어지기 전에 사용해야했기에 부랴부랴 서둘렀다. 뉴욕은 나의 첫 해외여행이었고 여행비자가 다 되기 전 까지 장기간 머문 곳 이었고, 결혼 전 장거리 연애를 할 때 서로를 보러 간 중간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결혼한 지 거의 5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우린 다시 뉴욕에 왔다. 이 도시의 반짝임과 여전히 정신없고 하루 다르게 새로운 장소가 생겨나는 이곳에서 눈 돌아가는 보물을 찾아 정신없이 다니는 모험심으로 왔다기 보단 그저 사랑하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 왔다.

사랑하는 친구들. 팬데믹 때문에 쉽게 만날 수 없는세상이 되어 더욱 아른거렸다. 문자로 안부는 물어도, 전화로 얼굴은 보아도 서로 쓰다듬어 만질 수 없는 아바타 친구들처럼 멀어진 공간이 꽤 컸다. 한국에서 케냐에서 독일에서 또 미국에서,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곳마다 서로의 집을 하루라도 내어주고 낯선 이국 땅에서 정말 ‘집’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던 건 ‘친구들’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주변친구들도 우리 못지 않게 둥둥 떠다니는 삶을 산다.

주말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익숙한 뉴욕을 여행자처럼 알차고 재밌게 보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나 우리가 먹었던 음식이 아닌 그들이 좋아하는 곳, 그들이 맛있어 하는 곳에 함께 갔기 때문이다. 시차 적응도 안 된 아침 7시 반에 일어나 지하철을 타고 연어베이글을 사러 간 영석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캘리포니아의 시차로는 새벽 4시 반에 아침도 안 먹는 사람들이 연어베이글을 사러 갔다는 사실이 말이다. 맛있는 맛에 진심이 친구는 먹다가 꼭 맛있는 부위를 나눠준다. 그 덕에 수산물 시장에서 집에서 가져간 와인과 함께 뉴욕 아스팔트에서 바다가 연상되는 재밌는 추억을 쌓았다. 순수한 진심이 동기가 되어 한 행동은 여행이 끝나도 꽤 머릿속에 맴도는데 그것이 퍽 감동이다. 난 그것에 무뎌 감동이 하룻밤이 지난 다음 날 뒤늦게 밀려와 아쉽지만 말이다.

또 우리가 왔다고 설레 새벽 5시에 일어나는 아이는 어떤가? 엄마가 방에서 설득했다는데 2시간을 참고 나와 조용히 우리가 자고 있는 침대에 머리를 넣고 꿈틀거리는 사랑하는 아이를 꽉 안았다. 아이가 아니라 어린친구. 차를 타고 가다 코너를 급하게 돌아 한쪽으로 쓸려가는 나의 몸대신 목을 꽉 안아 잡아주는 긍정이가 참 좋다. 친구랑 이야기를 하는 건 마치 비어있는 홈런볼에 슈크림을 가득 채워 넣은 기분이다. 스스로 마음을 잘 확인하고 하경이 자신을 잘 알아봐봐. 오년, 십년동안 / 짧게 보지 말고 좀 느긋하게 멀리/ 일을 하지 않더라도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좋은 시간이 될 수 있어. 일을 하는 것은 2-3 년 하고 나면 다들 비슷해지는데, 어떤 일을 하든 나답게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지. 하경이 네 자신을 너무 구석으로 몰지말고.

내가 띄운 운은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을 할까? 할 수 있을까? 잘 될까 ? 이었는데 대화를 마치고 정리해보면 정말 잘 숙성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남아있게 된다. 질문에 답을 주는 사람이기 보단 본질 근처에서 운을 떼게 도와주는 사람. 마치 고개를 휙휙 저어 주변을 볼 때 징검다리를 할 수 있는 디딤돌을 던져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긍정이가 가지고 놀던 포켓몬 에너지 바처럼 잠깐 친구들 얼굴을 보고 웃다 온 것 뿐인데 우린 가득 에너지가 충전되었다. 브루클린 꽃집에서 사온 베고니아가 내 비행기 메이트가 되어 발 아래에 있다. 이름은 웨이비 주니어. 하나 사니 하나를 더 주었는데 한개는 긍정이에게 선물하고 왔다. 그래서 긍정이 집에 있는 식물은 웨이비이고 내 건 긍정이의 말에 따라 웨이비 주니어란다.

숨통이 트는 건, 이 도시에 오아시스 같은 친구들 덕 뿐이고, 뉴욕이 더욱 매력적이게 보이는 이유는 다양한 사람들이 제 각기 살아가는 에너지 때문이다. 다양함이 아름답다. 서로 같은 것 하나 없는 사람들의 움직임 자체가 아름답다. 느즈막한 아침 호텔에서 나와 근처 이탈리안 커피 바에서 영석은 카푸치노를 나는 티를 사서 크롸상을 들고 공원으로 향했다. 센트럴 파크는 아직 봄은 아니었지만 곧 봄이 될 것마냥 작은 구근 식물들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이름모르는 새도, 물 위를 떼 지어 다니는 원앙과 오리들이, 분주하게 나무 위 아래로 올라다니는 청설모, 가을 낙엽에 쌓여 그 틈으로 올라오는 스노우드롭과 헬레보로스, 복수초가 문듯 잊고 있던 겨울의 희열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뉴욕의 센트럴 파크와 친구들은 이 도시의 오아시스다. 무거운 코트를 입고 다니다 점점 날이 따뜻해져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몇 시간 전 무거운 코트를 우체국에 가서 택배로 붙였다. 가벼워진 것 치고는 큰 대가로 우린 90불을 지불했다.

얼마만에 한 여행이고, 익숙한 곳에 가서 여행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했지만 새로운 장소를 가는 설렘보다 순간 순간 느꼇던 마음과 대화과 끝 난 뒤 남아있는 말들이 우리 마음 속에 있다. 익숙한 음식이 아닌 새로 먹어보는 음식을 시키고 경험하는 것.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구체적으로 알아가는 기억 말이다. 우린 생각보다 눈을 사로잡는 대도시를 좋아하고 도시 안, 조용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이 가까이 있다면 영원히 살 수 있을 거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친구들 한 두명이라도 있으면 금상첨화이고.

다시 바닷가마을로 돌아와.

새벽비행기로 집에 도착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밖에 정원을 살핀 일이다. 며칠 전 맨드라미 씨앗을 심어 놓고 갔으니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그래도 씨앗이 뚫고 나와 빼곰 얼굴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무성하게 자라는 한련화가 이제 주춤한다. 꽃이 피고 지면 씨앗이 그 아래 달려 열리는데 초록색이고 탱글하다. 시간이 지나면 푸른 색에서 누런 색으로 쭈글거리게 변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땅으로 떨어져 발화가 가능한 씨앗으로 다시 탄생된다. 그렇게 스스로 떨어져야만 발화가 될 수 있다. 다시 흙에 묻혀 다시 생명이 된다. 나는 떨어진 씨앗을 줍기 위해 쭈그려 앉아 거북이처럼 길게 목을 빼고 집중해서 땅을 살핀다.

때가 되고 영글면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어진다. 내가 서두른 다 한 들. 채워지는 시간 없이는 얻을 수 없다.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야 말로 곱다.

an incomplete pigeon

불완전한 비둘기가 내 앞에서 나를 보고 있다. 한발을 어떤 사연으로 잃었는지 모르겠지만, 꿋꿋하게 한 발로 서 있다.

점심시간 꽃집에서 두 블록 떨어진 벤치에 앉아 오이와 치즈 가득 넣은 빵을 베어 물며, 눈물이 주룩 나왔다. 그렇게 청승맞게 앉아있는데 이 비둘기가 나를 본다. 넌 왜우니? 빵도 먹으면서, 뭐가 그리 슬프니. 라고.

그러게. 한 발로 비틀거림 없이 오히려 우아한 모습으로 똑바로 서 있다. 난 먹다 멈춘 빵을 잘게 잘라 허겁지겁 비둘기 근처에 뿌렸다. 먹기는 커녕 나에게 강해지라 말한다. 그 사이에 뿌린 빵쪼가리를 날렵한 다른 비둘기들이 다 낚아채 갔다.

먹고 사는 거에 관심이 없다는 듯이 어쩌면 약한 마음을 가진 나를 훈계하듯 저 멀리서 나를 본다.

no title

11월 생각들을 묶어보면서 –

추운 도시에 잠깐 가게 될 터인데. 그 곳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나열해본다. 손과 발을 꽁꽁 싸매고. 춥지만 예쁘게 입고 싶다. 욕나올 거 같은 추위면, 커피숍에 들어가 뜨거운 라떼를 마시고 돌아다녀보는 나와는 정 반대의 로맨틱한 행동을 하고 싶다. 그곳은 미국에서 나의 고향같은 곳인데 그곳에 갈때마다 너무 추워해 눈사람처럼 두껍게 껴입은 뒤뚱거리는 기억뿐이라 이번의 나는 예쁜 옷을 입을테다. 두꺼운 스타킹과 함께 . 안에 얇은 겹의 옷을 껴입어야겠다. 신발은 발아파도 워커.

왜 자유로운 사람이 멋있는가? 자유를 추구하고, 사물을 보는 시점을 보다 자유롭게 하여 자신의 능력과 개성을 최대한 발휘하려고 하는 노력은 많은 이점을 낳는다. 우선 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결점을 확대시키거나 악행을 저지르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사물을 자유롭게 바라보는 데 있어서 그것들은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자유롭게 함에 있어 방해가 되는 분노나 혐오의 감정도 자연히 필요치 않다.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 활기차고 말쑥한 인상으로 비춰지는 것은 실제로 그의 정신과 마음이 이처럼 현명하기 때문이다. 문득 읽은 글

불확실한 기다림, 꼭 필요한 참을성, 느린 성장이 특별한 시간감각을 불러온다. 라고 요즘 읽는 땅의 예찬. 책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 첫째주 달마다 씨를 뿌리는, 그럴 수 있는 작은 정원이 나에게도 있는데. 씨를 뿌리고 기다리며 드는 생각이다. 불확실한 기다림. 그리고 요구되는 참을성. 결국에는 서로 서로가 다른 시간대로 성장. 나에게도 그리고 영석에게도 / 자기자신에게 속삭이는 너그러운 시간이 되기를

반짝 무더웠다. 도착한 8월 여름만큼 무더운 더위가 사흘 이어졌다. 아무 기척 없던 번데기는 갑자기 갈색으로 변했고 그 안에 나비의 날개는 선명해졌다. 먼저 일어난 나는 정원에 나가 선명해진 나비를 신기해하며 집으로 돌아와 영석에게 말했다. 변했다. 갈색으로. 아마 태어날지도 몰라/ 그 말을 듣고 영석은 모자를 쓰고 정원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시 돌아와. 나비가 되고 있어!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나는 신발을 부랴 신고 나갔다. 나비 하나에 호들갑이네 라고 생각이 들 수 있지만, 꽤 기다려오던 / 관찰해오던 / 순간이었다.

나비는 번데기 시절 작은 허물안에 쌓였던 응어리의 발악처럼 혹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권투선수처럼 날개를 빼내기 위해 헛발을 찼다. 신기해 보고 있다 안쓰럽기까지 했다. 도와줄까? 그런 마음이 들었지만.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말라는 영석의 말이 맞았다. 집에 돌아온 저녁 정원에 가니 번데기 작은 표피에 그대로 바싹 접혀 말린 한쪽 날개는 나비를 날아가지 못해 죽어있었다. 하루종일 번데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온갖 힘을 쓰던 나비는 날아가는 나비가 되지 못했다.

어이가 없었고, 미안했고 허무하고 슬펐다.

알에서 태어나 애벌레가 되고, 한 곳에 몸을 고정해 이주 넘은 시간을 보내고, 그 작은 공간에서 애벌레 스스로를 죽이고 그 양분으로 자신을 새롭게 만들었다. 그리고 작은 구멍을 찢고 번데기에서 나오면 다 나비가 될 줄 알았다. 번데기에서 나와 접혀있던 날개만 말리면 한 시간 후에 훨훨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줄로만 알았다. 아니었다. 어둑어둑해진 밤. 조명을 들고 영석과 정원으로 나가 바로 옆 나무에 흙을 파 애쓴 나비를 묻엇다. 움직이려고 발악했던 생명이 아무렇지않게 고요하게 다시 땅으로 돌아갔다. 알, 애벌레, 번데기를 지나 나비가 되는 건 일퍼센트 라고 한다. 나는 주변에서 꿀 찾아 돌아다니는 아름다운 일퍼센트의 나비를 아무렇지 않게 보았던 거다.

다 나비처럼 산다. 너도 나도. 너그러움과 사랑이 필요하다. 서로 서로에게.

no title of no title

여기에 써 있는 글은 두달 전부터 적어놓고 저장해놓았던 짧은 글들의 엮음들.

그대는 아는가? 툭하면 눈물이 나오는 시기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억지로 그려요? 그림도 인생도 억지로 해서 되는 게 없어요. 저절로 때가 되면 나옵니다. 작가는 그렇게 되는 거예요. 억지로 싸우다 보면 되는 게 없어. 싸운다는 건 버티는 거야. 그러면 빳빳해져. 부드러워져야 술술 풀리죠.”

빨간 티셔츠를 입은 아저씨가 양 옆 사거리 차로 가득한 거리에서 힘있게 혹은 힘겹게 위 아래로 다리를 움직여 자전거 바퀴를 굴리며 쌩쌩 지나간다. 해가 져 가는 오후였고, 바람을 일으키는 시원하고 힘찬 움직임에 아저씨가 입고 있던 빨간색 티셔츠가 펄럭였다. 저렇게 정직한 자신의 에너지로 나아가는 움직임을 사랑한다. 정직한 움직임.

수습하는 삶에서 해결하는 삶? 상류로 간다는 건, 다들 물만 보고 있을 때, 눈을 들어 물의 흐름을 본다는 것. 아주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는 것. 가장 중요한 심리적 자원은 겸손이다.

법률가가 되지 않았다면 무엇을 했을까요?

“(밝게 웃으며)헤맸을 것 같아요. 자신에게 떳떳하도록 마음껏 방황하면서, 내 삶을 자유롭고 진실하게 대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내적으로 더 많은 위기와 불안을 겪었어요.

떳떳하도록 마음껏 방황하면서.

어제는 태평양 땅. 이사 온 처음으로 천둥 번개와 우박이 치면서 비가 왔다. 저녁시간 종일 번쩍 거리는 하늘 치고 비는 그리 많이 오지 않았는데. 여기 기준에선 꽤 땅이 젖을 만큼 비가 왔다. 곧 수영하다 나온 할아버지는 맨 몸에 수건으로 치마를 만들어 비가 오기전 부라부랴 맨발로 우리집 앞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사계절 뚜렷하고 여름 겨울이 확연하고 곳에 머물다가 두껍고 무거운 패딩은 필요없는 곳에서 보내는 가을이 새롭다 . 이 맘 때쯤 되면. 떨어지는 낙엽이 아름다운 거리를 지나 핫 애플사이다를 마시러 간다거나, 꽤 일교차가 있는 온도 덕에 오븐에 온도를 올려 어설픈 쿠키를 굽는다거나, 생강을 잔뜩 사와 추운 날 잘게 잘라 오래 끓인 생강차가 필요 했었다. 확연히 변하지 않는 계절을 맞이하는 의식을 한다. 밖은 26도. 해가 쨍쨍하고 온 종일 반팔을 입어도 무색한 날씨에 마켓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강은 언제나 장바구니에 들어가 있고, 맛있는 쿠키의 레시피를 찾아본다거나 가을에 나오는 대추사과를 씻어 한입 베어문다. . 떨어지는 낙엽을 주어 책에 껴놓았던 작년 가을을 기억하며. Oct. 5. 2021

큰 작업. 그림 이야기를 하면서 큰 그림이 우리집에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을 했다. 옆에서 점심을 먹던 영석은 네가 그리면 참 좋겟다. 속으로 그래볼까? / 그런데 쉽게 나는 내 작업을 사랑하지 못했다. 표현을 하지만 붓을 내려놓고 나면 유치하고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벽에 붙어 있던 알록달록한 그림들을 떼어냈다. 그러면서 한 동안 판화에 빠졌고, 은은한 빛이 나는 은갈치 색으로 판화를 찍어냈었다. 그 후로는 물감을 만진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는 한 곳에서 발을 깊게 담근 사람들이 부러웠다. 빠져나가고 싶어도 깊숙하게 빠진 뻘처럼 한 곳에서 오래 버티는 사람들/ 뭐든 물어보면 다 알 거 같고. 요즘 드는 생각은 정해진 것들, 해오던 것들을 자연스럽게 바꾸는 카멜레온 사람들이 부럽다.

18. Oct.

꺼져버린 물거품 같았다. 쌓여있던 거품들이 스르르도 아니고 후르르도 아니고 순식간에 방울방울 터질 것도 없이 무너져내려 옷이 벗겨졋다. 내 것인 거 마냥 덕지덕지 감고 있었는데, 흘러져 내린 순간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허무한 내 자신을 보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벗겨져 당황스러운 내 표정을 마치 타인처럼 바라 보고 있다. 딱히 무슨 일이 있던 것이 아니라/ 요즘 이런 상상을 하곤 한다. 스믈스믈 올라오는 존재감 없음을 물리쳐보려고 하지만, 잘 모르겠다. 내 이름으로 되어 있는 고지서가 하나도 없다.

무지한 고집 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차를 끌고 다니고 싶은 마음이 없다. 우리집에 차 한대면 충분하다. 나를 증명해야하는 서류가 여권 외에 운전면허증을 제시해야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수꽝스러운 고집을 유지하기 위해선 자전거타기 실력이 퍽 따라왔으면 좋겠다. 할수 있는 방법과 선택지가 많은 사회였으면 좋겠다. 속삭이는 배려와 로맨틱이 살아있는 곳이였음 좋겠다. 햇빛과 바로 앞 바닷가에 운이 좋으면 이동하는 고래나 돌고래떼를 볼 수 있다는 것 빼고는 자랑할 것과 사랑할 것이 아직까지 많지 않는 이곳이다. 그럼에도 오래된 친구들과 오랜만에 전화통화를 하면 밝은 내 목소리가 여태껏 털어놓은 고민들이 즐거운 고민처럼 느껴진다라나. 하루종일 해를 받고 그런 해를 받는 곳에 살면 이런 목소리가 되어가나 보다. 떠돌아다니는 고민들은 언제나 푹 젖은 차가운 이끼에 담겨 나와 묵혔던 것들인데 여기서는 바짝 말릴 일 밖에 없다.

22. Oct. 21

“(미소지으며)어느 순간 우주의 별이 일렬로 서는 느낌이랄까요. 내가 배운 것들이 하나로 꿰어져서 이 일에 쓰이고 있다는 느낌…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 졸업 연설에서 그랬잖아요. ‘Connect dot!’ 저는 미래의 한 점을 보고 쫓아온 게 아니었어요. 그냥 갈지 자로 온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점들이 연결돼 있었죠.” 데이터 휴머니스트 김윤지씨가 한 말.

번데기가 된 줄 알았던 제왕나비 애벌레는 성인 네 걸음이면 갈 거리의 장소로 옮겨 예쁘고 작은 노란색 꽃에 숨어 있었다. 쳐다보는 이 없는 사이에. 낮과 밤이 지날 사이에 부지런히 행차했다. 며칠 안 보였기에 구석에 가서 혹은 다른집에 가서 변태를 하는 줄 알았는데, 내심 시야에 걸린 애벌레를 보니 사랑스럽다. 집어삼키는 포악한 것들에게도 살아남은 밤. 그러면서 문득, 밭에 심어놓은 이것저것 갈아먹는 놈이 얘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스위트피의 모종도, 열무도, 배초향도, 잘나오는 새싹의 윗부분을 뚝뚝 끊어놓는데. 가끔 그 현장에 가면 약을 칠까? 생각도 든다. 그러다가 누굴 위해서? 참 이기적인 생각이다. 노란 꽃이 가득한 꽃화분 저 자리에서 번데기 상태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번데기의 시간을 버틴 후 나비가 되어 진한 오렌지 색 날개를 펼쳐 훨훨, 태어난 이 곳, 여기저기 갉아먹던 작은 정원을 두번 돌아 남은 여정의 종착지인 멕시코로 무사히 날아갔으면…

낚시꾼은 나가고 싶을 때만 나가고 대어만 자랑하잖아요. 어부는 달라요. 어부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다에 나가고 내가 잡고 싶은 것, 팔릴 것 다 잡아요. 이런 글을 읽었는데 나는 어떤 바다에서 그물 내리는 어부일까 생각이 들었다. 초조함에 수없이 나만의 바다를 만들고 싶어 허우적 거렸던 쾰른과는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심적으로는 성장한 것 같은데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나밖에 없는 나만의 바다에서는 수확의 기쁨을 있을 지 언정, 물 밑 갈치와 불가사리와 돌고래 밖에 눈 마주칠 사람이 없는 건 아닌가? / 집 근처 세라믹 스튜디오에게 편지 한장 써야겠다.

아빠는 전화를 자주 기다린다. 그리고 그 기다림을 나에게 자주 이야기를 한다. 그렇기에 시간이 되면 혹은 시간을 내서 잠깐이라도 전화한다. 반면, 엄마는 언제나 걔네 바쁘니까 알아서 하겠지 이렇게 쿨하다. 그러다보니 오늘 엄마랑 일주일만에 길게 통화를 했다. 어제 만든 영석이 생일 케익이 반토막 난 식빵 같다나. 어머니도 그래서 내가 그거 식빵아니에요. 바나나 케익이에요 말했다고 하니 깔깔이다. 선크림 바르고 가꿔라. 매일 하는 사랑 가득한 가꾸라는 잔소리를 들었다.

엄마. 나는 꿈이 뭘까? 꿈은 원래 아이 때 많이 꾸는 건데, 나는 뭐하는 사람일까? 그리고 뭐하는 사람이 될까? 라는 질문을 수없이 해.

하경이는 풍부하니까 감성이. 무슨 직업은 모르겠는데 하경이는 그런사람이지.

하경이는 잘하지. 지금 여기서도 살고 저기서도 사는데 그건 아무것도 아니게 잘 할 수 있지. 싫다고 안하면 먹고 살 수가 없어. 충분히 하경이는 잘 할 수 있지/

대답이 끊나기도 무섭게 얼굴이 구겨지며 울었다. 분출하는 화산처럼 . 잘할 수 있다는 소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 스스로한테 해 줄수 없던 말을 나를 낳은 이가 자신있게 확신했다.

엄마 나는 요즘 버겁다는 생각해. 누가보기에는 행복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도 그 안은 버거울 수 있잖아. 딱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삶이 그런 거 같아. 엄마도 그럴테고, 아빠도 그럴테고, 유진이도 그럴테고/ 내가 요즘 밖 정원에 있는 애벌레를 관찰하는데. 쟤도 버거운 삶을 살아. 애벌레 조차도

하경아, 네가 느끼는 것들이 우리의 뿌리야. 나름대로 삶이 버거운 것이 모두의 뿌리지. 그래서 하늘을 바라보는 거고, 그런 뿌리를 가져서 우리가 하늘 아버지를 알아가고 고백하는 거지.

내 삶은 자꾸 리셋되는 거 같다. 다시 시작이고 다시 시작이고. 새 학기 되면 어색한 언어로 손 발을 꼬아가며 자기소개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의 뿌리 22. Oct. 2021